[...] 문보영의 일기에서 저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누군가의 일상을 훔쳐본다는 느낌을 받는 타인”이다. 심지어 작가인 문보영조차도 문보영-일기에 관해서는 바로 그 “타인”인데, 이때 타인이라는 의미는 내 안의 타자성이나, 타인의 시선을 투사한 ‘나’와 같은 개념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타인’을 말한다. 문보영의 일기 주체 ‘나’는 저자와 완벽하게 불/일치된 무언가가 아니라, 차라리 어떤 ‘캐릭터’, 혹은 일기 주체라는 ‘기표’에 가까운 무엇이기 때문이다. 문보영의 자기 전시와 자신을 문제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은 집단적이고도 익명적인 (구)독자들의 비/가시적인 읽기와 다시 쓰기라는 맥락 속에서 문보영 개인의 삶-서사라는 특권적 위치를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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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진실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는 그것이 처음부터 배척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지속적인 불확실성,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정해서는 안 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특성이다.
히토 슈타이얼에 따르면 ‘진실’의 장르인 ‘다큐멘터리’에 관계하는 독자/관람자의 해방감(이란 것이 있다면)은, 어쨌거나 진실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 진실의 조작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불확실성 위에서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특정한 관습에 따라 만들어지는 산물”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합의된 지금, 다큐멘터리가 묘사하는 것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형식 자체의 권력 의지”라는 의심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여전히 그 특별한 형식은 얼마간의 진실성을 포함한다고 믿어지며, 이는 보는 이의 동요와 진동을 발생시킨다. 보는 자의 바로 이 ‘지속적인 회의’ 위에서만, 다큐멘터리라는 진실의 형식은 “철학적인 문제를” 던지는 “인식론의 전쟁터”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문보영-일기는 한국 문학의 내적 서사나 특정한 윤리 모델의 연속선상에서 한정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보다 문보영-일기는 ‘진실’의 문제와 관계하는 예술 장르가 그것의 역사적 배경 및 현재적 기능과 맺는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에세이라는 형식이 수행하는 기능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저자-독자 간의 변화된 상호 작용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더욱 중요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히토 슈타이얼은 다큐멘터리의 차이 ‘들’에 대해서, 만드는 자의 개인적 윤리나 진실에 대한 접근성만을 문제 삼지 않는다. 텍스트 간 유효한 차이는 차라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의 ‘선명한 표출’에 내재한 “비판의 관점(거리)”에 달려 있다. 주체와 진실성, 그리고 문학과 현실이라는 경계에 대해, “예술적 형상 이미지를 통해 실제의 삶과 접촉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비판적으로 확산될 경우 ‘진정한 삶’, 혹은 ‘삶의 진정성’이라는 예술적 환영 이미지는 마침내 이데올로기적 권력과 조우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강동호는, 바로 이 슈타이얼의 문제의식을 경유해 ‘비판의 관점’과 관련한 문학의 차이(가능성)를 살핀다.
그에 따르면, 예술의 진실성이 아닌 가상성에 대한 제대로 된 탐구가 “완벽한 대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이 구축하는 적대의 전선을 해체하는 간극의 형상을 발견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예술의 가상성은 “창작자의 영감이나 창조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소박하게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문학과 현실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가시화될 수밖에 없는 저 불일치에 대한 응시와 사유 속에서 비판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것”(강동호,「문학의 정치- 재현, 잠재성, 민주주의」, 24-26)이다.
그런데 그것의 비판적 보존을 증명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모든 작품이 그것의 본래적 ‘불일치’를 역량 삼아 동일한 수준으로 비판적인 것이 될 수 없다면, 작품 간 차이는 텍스트의 내적 논리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비판적 보존의 자리에 대한 인식은, 에세이라는 ‘간극’의 장르에 대한 현재의 비평 담론에서도 보여지듯, 문학장의 소박한 문제의식을 벗어나는 것으로 쉽게 확장되지 않는다. 문학의 가상성이 원천적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그 ‘간극’이 다시금 예의 그 저자의 윤리와 책임의 문제로 매끈하게 포장될 수 있는 많은 가능한 이유 중에서, 우리는 강동호의 비판에서도 여전히 부재하는 그것, 즉 기존의 ‘한국 문학’이라는 경계 자체를 교란하는 것‘들’에 대한 비평의 무관심을 거론할 수 있다.
문보영의 일기에도, 강동호가 지적한 ‘진정한 삶’이라는 환영적 이미지가 “이데올로기적 권력과 조우할” 위험이 없지 않다. 문보영의 텍스트가 ‘일기’의 안과 밖에서 수행 중인 수많은 끼어들기와 방해하기, 교란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의 내적 논리는 여전한 위험성을 지닌다. 이를테면 그가 끝없이 재건하는 ‘나’의 ‘규칙’들이 ‘나를 살리기’로서의 추동력으로 매끈하게 이어질 때, 문보영-일기의 형식은 다시금 우리네의 그 ‘진정한 삶’이라는 내용으로 환원될 가능성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저는 일기를 너무 많이 쓰다가 어느 순간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것에 탈진했어요. ‘나’ 파산이라고 해야 할까요? 타인을 관찰하는 관찰자로서의 ‘나’를 화자로 쓰더라도 ‘나’를 주어로 2년 동안 독자들에게 일기를 보내고나니 어느 순간 괴로워지기 시작했어요. 할 얘기가 고갈되어서가 아니라 미안함 때문에 그랬어요. ‘나’라는 화자를 쓰면 저 혼자 무대에 올라와 있고 사람들은 관객석에 있는 기분이거든요. 다 같이 무대에 있고 싶은데, 혹은 저는 무대 뒤에 있고 싶은데 말이에요. 관객들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지정된 좌석에 앉게 한 기분이 들었어요.
혼자 무대에 올라와서 청중을 향해 이야기할 때 제가 느끼는 감정은 ‘무한한 송구스러움’이에요. 이 일방적인 구도가 슬픈 거죠. 그런데 제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은 따로 있고 그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무대 뒤에서 내레이터가 되어 들려준다면? 그러면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를 갖다 버리고 모든 문장을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이와 관련해 눈여겨 볼 점은, 문보영-일기의 ‘1인칭에서 3인칭화’라는 과정의 의미이다. 독자 소외에 대한 ‘미안함’, ‘일방적인 구도에 대한 슬픔’과 같은 발언들은 마치 저자의 ‘저자’라는 독점적 위치에 대한 자기반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얼마나 진실한 반성인가(그래서 얼마나 윤리적인가)가 아니라, 어째서 이런 종류의 반성이 다름 아닌 ‘일기’라는 형식에 제출되는가에 있다. 일기란 본래 ‘나’의 이야기이며, 심지어 ‘나’의 일방적인 발화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문보영-일기는 일기 형식이 내포한 바로 그런 진실성과 이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 즉 ‘독자’를 의식하며 ‘무대’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다. 문보영-일기는 그 ‘제멋대로인’ 독자 읽기의 위험성을 제거하는 데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꺼이 껴안으며, 끝없이 '일기'라는 무대를 건설한다는 점에서 그 질적 차이를 획득한다.
[중략]
문보영-일기는 작가 자신에게 포착된 기존의 일상을 단지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굴절된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기 위에 일상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창조한다. 이 현실이 우리가 발 딛고 선 실제 현실인가 아닌가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보다 유념해야 할 특징은 그의 일기란, 진실과 거짓의 논리를 넘어서서, 현실적인 요소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여러 요소가 삶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것을 가시화하며 그 모든 요소들의 경계면을 횡단한다는 점이다.
앞선 「문보영-일기」에서 나는 문보영-일기 전반에 흐르고 있는 최소한의 공통성을 하나로 고정된 거대한 세계관이 아니라, 유동적인 세계감(感)으로 이해했다. 문보영의 일기와, 그것을 대하는 독자의 의식은 ‘거대한 세계관’이 아닌, 특정한 공유 감각을 구심점으로 삼아 형성되지만, 동시에 독자가 그것에 대한 이중화된 거리두기를 수행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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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이한 믿음 속에서 독자들은 일기 주체가 겪는 사건과 고비를 통해, 혹은 ‘나라면 어땠을까’와 같은 동일시 과정을 통해, 그의 성장(?)에 쾌락을 얻지 못한다. 독자는 물론 작가 문보영조차도 이곳에선, 이미 철저히 일기화된 일기 주체인 ‘문보영’과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기 주체의 삶은 ‘자기 전시로서의 연기’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되었으므로, 비로소 욕망된다.’라는 원리를 토대로 삼아 ‘나’와 관계한다. 일기를 둘러싸고 수행되는 독자의 여러 행위는 이 ‘나’의 관계성이 지니고 있는 ‘간극’을 여러 해석의 충돌 지대로서 경험하고, 심지어 다른 ‘나’를 직접 구성해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횡단에 있어 ‘일기’가 결코 안전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 그러나 바로 그 위험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 문보영의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문보영-일기는 말 그대로 “인식론의 전쟁터”로서 기능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