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우리가 동시에 인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것에 일치하면서도 끝없이 미끄러지(려 하)는 ‘문보영-나’ 사이의 간극이다. ‘나’는 이들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비밀을 진짜 비밀로서 승인 받는 동시에, 자신의 비밀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비밀을 요구하는 이들로부터 그것을 철저히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때 ‘진실함’의 증명과 그것에의 요구(라고 가정되어진 일기 주체의 강박)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진짜’를 둘러싼 저자와 독자 사이의 팽팽한 놀이의 층위에 방치하지 않으려면, 문보영 일기론의 핵심, 즉 ‘일상 연습’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상 연습’은 문보영 일기의 출발점이 ‘일상이 파괴되었다는 감각’, 즉 일종의 극단적인 우울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우울의 감각은 그의 텍스트에서 ‘불면의 밤’과 ‘공황’ 등 질병의 증세로서 묘사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나’로부터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나’로부터 한 발 떨어진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특정한 세계감(感)의 한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시 「배틀그라운드」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나’는 늘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원을 향해” 뛰어야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원을 향해 뛰”고, “원을 향해 뛰어야” 하지만, 원이 생기는 데는 “약간의 운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원’의 이 같은, 도무지 끝이 없는 반복적 재생은 ‘나’의 불안의 근원이 된다.
오빠는 말했다. 본인은 불안을 배틀그라운드 숲에서 다 써버린다고. 기초대사량으로 하루 동안 소비해야 할 불안을, 배틀그라운드를 하면서 다 소비한다고. ‘정말이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니까. 얼마나 불안한지…,’ 오빠는 말한다. 불안을 다 소비해서 현실에서는 불안이 없단다.
(…)
새로운 생명을 얻은 오빠는 배틀그라운드 바닥에서 뭔가를 다시 주워 먹고 힘을 내 원을 향해 뛰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엉…. 오빠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고 오빠의 불안적 미래 뒤에서 나는 불안에 대해 연구했다.
(…)
고통과 불안 없이 지하철을 타고 있는 나 자신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다.17)
17) 문보영, 「불안 그라데이션 기능 탑재 요망」, 블로그 일기(2018. 11. 15.)
‘원’과 ‘자기장’의 작동원리 속에서 가능한 “오래 살아남는” 것이 이곳의 목표이지만, 동시에 이곳의 원리는 “죽을 수도 없거나 끝없이 죽”게 만드는 ‘시뮬레이팅’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삶-죽음도 실상 최종적인 무엇이 될 수 없게 한다. 남는 것은 오직 불안뿐이다. 이때 문보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하루치의 ‘기초대사량’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불안이, 다름 아닌 이 ‘원’의 세계, 즉 ‘배틀그라운드’ 내에서 모조리 소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내면’이라는 공간에서 형성되는 주체를 그저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이 전장(戰場) 바깥의 세계 따위는 없다. 그가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료하고 권태로운 ‘세계’를 피해 그 ‘바깥’에서 구축하는 “기기묘묘한 이야기”, “기기묘묘한 모험” 정도로 해석될 수 없는 이유이다. 오빠가 ‘배틀그라운드’라는 메타적 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불안을 소비하듯, 일기의 주체는 ‘일기’라는 메타적 일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만큼의 불안을 소비해야만 한다. 소비를 위해 ‘나’가 우선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불안을 ‘연구’하는 작업이다.
[...]
몇 번의 연재에서 제발트에 대해 떠든 이유 또한 비슷한데, 결국 제발트도 브이로그의 문학 버전이기 때문이다. 일상이 파괴된 우울증 환자로 지내면서 나를 일으킨 건 브이로그였다. 사람들이 별거 안 하며 사는 모습, 야망 없이 살아가는 모습,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똥 싸고 양치하고 산책하며 비둘기 똥을 만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똥 싸고 양치하고 산책하며 비둘기 똥 만나서 웃는 걸 하고 싶어진다. 브이로그와 제발트는 인생의 디폴트값으로서의 욕망을 연습하게 해준다.21)
21) 문보영, 위의 글.
‘불안 연구’, 즉 관찰과 묘사라는 기록을 통해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일기를 통해 불안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나 자신을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구축하고, 그것을 다시 ‘나’에게 보여주며, 나를 속여 내려 한다. 요컨대, 문보영에게 일기는 ‘나’가 모방하고 연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나’를 담은 거울이며, 때때로 나조차 나 자신의 ‘진정한 비밀’로 믿을 만큼 ‘내면’의 구축과 그 효과에 있어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무엇이다.
세상에는 “일상을 살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문보영은 자신이 “후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이러한 일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연습’의 대상인데, “인생의 디폴트값으로서의 욕망”을 연습하기 위한 대상은 ‘야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모습’과 같이 다소 관념적인 형태이거나, 혹은 “밥 먹고 똥 싸고 양치하고 산책”하는 습관적인 행위이기도 하며, 그러한 행위 전시의 “문학 버전”인 ‘제발트’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대상은 일기로 형성된 진정한 ‘문보영-나’와 그 텍스트이다.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안 그랬어요. 밥도 안 먹고, 안 씻고, 울기만 하던 나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걸음마 하듯 일상을 꾸려 나갔어요. 일상을 사는 데 연습이 필요하더라고요. 밥 잘 먹는 내 모습을 브이로그로 시청하면서 따라했어요. 선 영상 후 따라잡기랄까요.22)
22) 문보영, 유계영 인터뷰 중 문보영의 말.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시가 아닌 것들을 내 삶에 초대하기〉, 《문학선》 2020 가을호.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즉 “선 영상 후 (그 모습을–인용자) 따라잡기”는 이른바 ‘내면 도출’의 역행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자신의 ‘내면’ 혹은 ‘진짜 자아’로 설정된 그 일상을 ‘관찰’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역으로 ‘반복’하는 이와 같은 인생 연습과 그 자체로서 삶-쓰기라는 일기는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작업”이 된다. 이처럼 일기-쓰기와 일기-쓰기로서 삶의 방식을 지속하는 태도는 일기로 형성되는 ‘주체-나’에 대한 ‘의심’과 그 의심의 연장선에서 행해지는 거짓된 맹세로 읽힐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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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문보영의 일기 주체가 행사하는 거짓으로서의 맹세는 냉소와 명랑 따위로 환원되지 않는 “글쓰기-의지”이자, 그 자체 “글쓰기-작업”26)이다. 쿠키런의 달리기를 일기-쓰기에 비유했던 ‘나’ 역시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그 의지-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아무 희망도 없다네, 그렇지만…….”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27)
26)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27)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96쪽.
ㅡ 최가은, <문보영-일기>, 문장웹진, 2020.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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