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고는 근래 문보영의 일기가 놓여있는 자리를 다시 생각해본 글이다. 다시 생각해본다고 말했지만, 더 솔직하게는 한국문학 비평의 ‘에세이 담론’에서 문보영의 일기를 구출(!)해내려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쓰는 독자’의 자리이다.
문보영의 일기가 ‘문보영-일기’인 이유가, 이 ‘쓰는 독자’라는 예외적인 자리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문보영 역시 여기에 ‘저자’라는 환상적 권위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 쓰는 독자로서 참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다양한 ‘쓰는 자’들의 출현으로 인한 ‘문학’의 탈권위적인 경계 확장…과 같은, 형식적으로 민주적인 방식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보영-일기의 예외성은 철저히 문보영 ‘나’의 성격에서부터, 그리고 그 성격이 다름 아닌 '일기'와 맺는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다시 말해 이 순환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독자 쓰기’에 관한 이야기는 앞의 글에서 실컷 했기 때문에, 이번엔 ‘나’의 특성에 대한 생각을 좀더 이어가보고자 한다.
나는 문보영의 ‘나’가 특정한, 그러나 불분명한 공포와 대면하는 일을 필사적으로 회피하는 것으로써 ‘일상’이라는 양식을 지속한다고 생각해왔다. 내 생각에는 이때 ‘일상’을 예의 그 ‘삶’으로 번역하는 것으로부터, 문보영의 텍스트 전반, 심지어는 그의 일기마저 ‘삶의 진정성’과 같은 보편화된 층위에 위치되는 오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의 수없이 파괴되고 재건되는 (그리고 다시 파괴되는) ‘일상’은 정말 삶, 그러니까 그 ‘삶’인가? 그의 일상이 우리네의 '그' 삶이 아니라는 사실이야말로 문보영이 ‘일기’라는 특정 장르와 관계 맺는 핵심적인 이유가 아니었던가. 그의 일기가 무료한 일상에서 발견되(고야 마)는 삶의 어떤 진실과, 그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통해 독자에게 위안을 건네는 류의 에세이로 묶여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가 제시하는 ‘일상’의 성격에 있다. 문보영 일상의 이상한 성격 때문에, 저자 문보영은 일기 속 ‘나’의 절대 주인이 될 수 없는데, 주인 없는 ‘나’의 이야기는 완결된 서사로서 독자에게 가닿는 일도, 그 독자(들)에게 예정된 감응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독자 쓰기’의 개입 역시 불가능해질 것이며 남는 것은 오로지 ‘저자-나’와 그의 삶-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일상은 삶이 아니라, '일기'라는 장소를 통해서만 지속되는 하나의 약속된 패턴이다.
책상을 쾅 두드려 집에 가려는 나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문보영 ver.)
― 임지은, 「#집에가고싶다」
임지은 시인에 의하면, “책상을 쾅 두드려 집에 가려는 나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곧 “집에가고싶다”는 문보영 식의 표현이다. 흥미로운 것은, 문보영의 ‘나’에게 저것은 집에 가고 싶다는 특정한 소망의 표현인 동시에, "문보영 ver."라는 특수한 패턴 자체이기도 하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문보영의 저 특수한 패턴은 (같은 시에서 언급된 다른 시인들과 달리) ‘집에 가고 싶다’의 표현이자, ‘도서관에 가고 싶다’의 표현이기도 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잠을 자고 싶다’, ‘잠을 쫓아내고 싶다’, ‘피자를 먹을 때가 되었다’와 같은 무수한 변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문보영 ver.의 작동 원리이다. 저 패턴을 다름 아닌 ‘일상’의 외양을 두른 공식으로 유지하기 위해 문보영의 ‘나’는 일기를 통해 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일상이어야 하는 걸까.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일상’이 어떤 공포, 더 정확히는 그에 대한 회피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이다. 미지의 공포에 대한 그의 필사적인 외면은 그 대상을 종종 ‘죽음’으로 해석하게 할 여지를 남긴다. 그런데 '죽음과의 대결'이라는 이 문제적 구도는 그의 ‘일상’을 사수해야 하는 '진정한 삶’과 혼동되게 하는 주된 원인이다.
부족하다
길 한가운데 뭐가 있는데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게오르크가 생각해낸 방법은
여기까지만 쓰는 거였다
벚나무는 묘하게 멀리 있다
어제보다 좀 더 갔다
다시 찾아가고픈 것이다
(…)
눈을 감으면 사방이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지만
너는 눈꺼풀 뒤를 보고 있다
게오르크 어제보다 더 갔다
미래가 두려워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와본다
― 「지나가기」 (문보영, 자음과모음 2022 여름호) 부분
문보영 ‘나’의 특기인 ‘거부’와 ‘외면’, 그리고 ‘숨기’ 등은 언제나 의심을 유발한다. ‘나’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는 지나치게 사소한, 달리 말해 상당히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게 특징인데,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그 두려운 것에 맞서 ‘게오르크’가 하는 일이라곤, “길 한가운데 뭐가 있”고 그것을 피하고 싶다고 말한 지점에서, 바로 “여기까지만 쓰는 것”, 그러고는 "묘하게 멀리 있"는 벚나무를 떠올려 보는 것,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이런 소박한 행위 자체가 실제로 필사적인 몸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길 한가운데 있는 그것이 하여간에 많이 두렵고, 그저 피하고 싶은 무엇이라고 말하기엔 말 그대로 어딘가 "부족하다". 그는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나치게 외면하면서도, 오직 그것과만 관계하려 한다.
수염
지나가기를 소망했다
(…)
벚나무에게는 콧수염이 있다
벚나무는 그것을 게오르크에게만 보여주었다
콧수염 덕분에 벚나무는 어두운 곳을 더듬어 길을 찾아 갈 수 있다
벚나무가 미묘하게 살아 있다
그는 굳이 “지나가기를 소망”함으로써 우리에게 그것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두려운 상황에 대한 탈감각적 반응
저기 공이 있는데
닿으면 죽어
저기까지 안 가는
시 쓰기 훈련 중인
나
닿으면 죽는 공이 있는 그 곳까지 “안 가는/시 쓰기 훈련”을 하며,
찾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다
게오르크의 낙타가 사막을
걷는다
해가
너무
세
차라리
해를
정면으로
본다
게오르크의 낙타를 앞세워 “찾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을 반복한다. 바로 이런 끈질긴 반복과 집중 때문에 우리는 어느샌가 그와 함께 정확히 그것을 두려워하게 되며, 그의 보잘 것 없는 행위에 진지하게 참여하게 된다. 실로 이곳에는 '그것'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나'의 행위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스티비’의 편집 문제 때문에 제대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문보영의 시 「지나가기」 원문에는 각 연의 말미에 동그란 원이 장소를 조금씩 이동하면서 끈질기게 붙어 있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닿으면 죽는다는… 그 공?)
최근 나는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워크룸프레스, 2021)에서 반복되는 어떤 몸짓을 읽으며 문보영의 저 외면을 떠올렸다.
소설 속 ‘나’는 루마니아 난민이며, 가족 서커스단의 일원이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와 이모는 말 그대로 죽음을 담보로 한 거래를 통해 하루치의 삶을 보장 받고, 한시적으로 연장된 그 삶을 산다. 죽음과의 즉각적인 거래인 이 삶에는 일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에게 ‘삶-죽음’ 사이에 낀 저 ‘서커스’라는 공연 자체는 삶이 아닌 ‘일상’이다. 그것은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나’에게만큼은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전격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죽음’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의례적인 행위들로 한 차례의 ‘죽음’을 지연하는 척 하는 일, 내게는 어차피 허락되지 않은 그 삶을 사는 척 하기 위해 ‘일상’이라는 양식을 지속하는 일일 뿐이다.
‘나’는 “집이 연기처럼 증발해 버리지 않도록” “트레일러의 문을 최대한 조금만”(16) 열고, 무대 위에서 머리카락으로 천장에 매달리는 엄마에 대한 불안을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38)의 아픔을 상상하는 것으로 관리한다. 때로 엄마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녀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일을 진지하게 수행하기도 한다. 이때 ‘나’의 공포는 분명 가족의, 그리고 뒤이어질 ‘나’의 ‘죽음’이며, '나'의 모든 행동은 “닿으면 죽어”라고 말하는 공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가 죽음으로 추정되는 그 무엇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엄마의 '영원한 잠들기', 즉 죽음을 소망하는 것으로써 저 행위들을 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문보영의 일상을 죽음에 맞선 성실한 삶-살기로 대체할 수 없게 만드는 돌출 역시 이처럼 느닷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등장한다. 그것은,
[북클럽에서… 계속….]